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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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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동 2019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때는 그의 의식과 무의식(또는 우연?)이 혼합되어 작품이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 편이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 선보인 작품은 사실은 그의 모든 지성을 동원해도 설명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러한 갭은 시각예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인간의 뇌는 본디 언어적 신호와 시각적 신호를 처리하는 기전이 다르다. 옥타브 하나가 균형을 맞추고 동시에 진동할 때 느껴지는 화음을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이고 줄지어 가지런히 놓여있는 물건들의 딱 맞춰진 배열을 볼 때의 쾌감을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거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어떤 시각적 기호들. 누군가는 이걸 푼크툼이라는 용어로 설명을 시도했더랬지만 뭐 그런건 그냥 그럴 수 있는 무수한 경우의 가짓수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결코 그걸 이해할 수 없는거다. 사실은 우리가 느끼는 것 바로 그 지섬에서 그저 그것이 존재할 뿐이다. 가끔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이런 저런 이론들을 동원하여 치장하는 것을 보곤 한다. 자신의 개인사를 고백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열정과 고생을 뱉어내기도 한다. 아마도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으리라. 그럴 때 그냥 침묵하면 가장 좋은데 그걸 억지로 어떤 이야기로 짜맞추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수업을 듣고 생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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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ng Huang

배가 지나갈 때, 멀리서 그 배를 바라보며 조그마한 유리병을 들어 손에서 떨어뜨린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날 이들을 배경삼아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바다 그리고 어떤 마음을 담아낸다. 이 사진은 순수한 마음일까 또는 그 어떤 것을 우러나게 하기 위한 장치일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보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고 누군가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의 흔적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미학적으로 사진언어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는 나는 부차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뛰어난 사진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프레이밍을 해야하는지 그 안의 미장센은 어떠해야하는지 대상들의 예측되는 움직임은 어떠해야하고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하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담아내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지. 하지만 난 그런 사진이 재미가 없다. 시각적 아름다움과 정서를 환기시키는 힘. 또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파문을 남기는 행위는 비단 사진이 아니어도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미술로서의 사진이나 철학으로서의 사진이 별로 매력적이게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이 더 좋다. 그럴 때의 사진은 미학이나 문학의 열등한 시녀가 된듯한 기분이다. 굳이 왜 그걸 사진으로 해야할까? 무얼 전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르키면 나는 그 방향보다 그 사람을 보고 싶다. 그 방향이 어디를 가르치는지는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너와 나의 만남이라는 것.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 함께 동시대를 호흡하며 걸어나가는 것. 가끔 좋아하는 사진가 아는 선배나 지인의 사진전을 가곤한다. 그 작품이 어떠냐는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가는거다. 아! 당신은 오늘 이렇게 살았군요. 하는 그 반가운 인사. 생존신고. 존재들의 대화. 당신의 마음을 내가 응원하고 있습니다.

귀 (歸) – 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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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nho Park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가 Chanho Park 의 사진전 귀(歸). 사실 처음에 사진전의 제목을 보고는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제목인가라고 생각을 했었다. 붉은색 배경에 한자어로 ‘귀’를 써놓고 옆에는 영어로 RETURN을 써놓았다. 그래서 ‘귀’라는 단어를 귀신(ghost)의 ‘귀(鬼)’로 보고 귀신이 돌아왔구나 라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왜 붉은색으로 했을까? 개인적 의미연상으로는 이 사진전의 컬러는 붉은색을 쓰면 안되었을것 같은데 말이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영어로 돌아오다는 RETURN. 실제로 영어에서 누군가 죽는 것은 passed away라고 쓴다. 가버린다의 의미라고 할까. 그런데 그냥 RETURN이라고 해놓으니 이게 구어체로 go back인지 come back인지 햇갈린다. 귀환해서 돌아온건가 귀환해서 가버린건가.. 나는 이 의미불분명이 분명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정작 한자는 돌아가다가 아니라 돌아오다로 되어있다. 돌아올 귀. 그러니깐 귀는 애당초 화자가 있는 위치로 RETURN을 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무엇이 돌아온다는 뜻일까? 영화의 역사에서 모든 작가들의 꿈은 영원히 시간을 지속시키는 것이었고 이것은 그들을 몽타주를 뛰어넘어 쁠랑세캉스로 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욕망은 시간의 확장 뿐 아니라 좁은 프레임에 갖히지 않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으로 향했다. 들뢰즈가 이야기한 외화면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세계의 뒤편으로 열려있는 무한한 공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하나의 진화였다. 그런데 이 사진전에서 작가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의 프레임 안에 보여지는 대상을 가져다 놓음으로서 의미를 전달해야하는 사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작가는 사진전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이력을 고백하고 죽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개인사를 드러내고 있다. 꼭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간에게 상실(loss)이란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다. 고전적으로 우울증은 자신을 버린 대상에 대한 분노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상실이란 유아가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영원히 저 세계와 이 세계를 분리시켜버리는 충격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은 어둠속으로 침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추측해보자면 돌아올 귀는 돌아와달라는 간곡한 외침. 하지만 그 외침을 감히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동사형이 아닌 명사형으로 끝낼 수 밖에 없는 간절함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까지 소환하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사진전은 좀 산만하게 보여졌다. 무언가 정리가 되지 않은 어수선함. 프린트도 책의 인쇄상태는 좋은데 반해서 전시 프린트는 크기나 종이의 선택이나 프린트의 톤이나 여러가지 것들이 좀 아쉬웠다. 날 것의 감정들은 쏟아져 터져나오는데 여전히 어디로 향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내용과 형식들. 분명 질문은 있는데 대답은 불충분했다. 그런데 뭐 전체적으로 나는 그래서 이 사진들이 정말로 솔직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개인사를 어떻게든 승화시켜보려고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바로 지금의 나를 담아내는 솔직한 기록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을 뒤흔들어 놓을 일들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금방 정리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어떻게 단정하게 미학적으로 정돈된 프레임 안에 가지런히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런걸 가식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진실을 직시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한거다. 끝내 조우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성시점경 (盛市點景) – 김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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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onho Kim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그리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쓰라리게 동시대를 그린 사진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나는 소리치지 않아도 멀리 퍼지고 오랜 잔향을 남기는 사진이 참 좋다. 그건 마치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유조선 처럼. 무겁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처럼. 느껴진다. 한껏 날아올랐다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불나방. 시간의 무게에 소멸되버리지 않고 그 긴긴밤을 버텨내어 살아남은 존재들만이 가지는 힘. 외치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저멀리까지 전해지는 존재들의 아우성. 사진가 김문호의 사진전 성시점경을 보고 있자니 그의 과거 전시였던 온더로드, 새도우, 성시점경. 이 모든 작품들을 한자리에 다 걸어놓고 하염없이 보고싶어졌다. 사실 사진들은 하나하나 다 동시대를 다루고 있고 마치 로버트 프랭크가 뉴욕을 그린 것 마냥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미시적으로 사진을 하나하나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이 시대가 어디론가 표류하더라도 한 자리에서 서서 그 시대를 처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다. 예술은 역시나 작가의 삶과 그 방향의 ‘일관성’으로 드러난다. 시간은 진짜만을 발굴해내는 법이다.